2015년 3월에 열렸던 가오갤 행사에 가지고 갔던 퀼로난(aka 성길로난) 원고를 업로드합니다.
원래 계획은 떡제로 만들 예정이었으나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중철배포본으로 바뀌었는데ㅠㅠ 분량이 애매모호하여
천원이라는 돈을 받구 팔았던 책입니다ㅠ-ㅠ 다시 한 번... 그 때 구매해주신 분들 사랑합니다ㅠㅠㅠ
여전히 떡제로 만들 계획은 있는데 과연 언제 만들지는 미정이옵고...
그 때가 오면 이 포스팅은 알아서 삭제가 될 것입니다...ㅋㅋㅋㅋ 그 날이 빨리 왔음 하는 저의 소망...(먼산
피터 퀼의 어썸믹스처럼 만들고 싶어서 파트별로 어울릴법한 노래들을 정하구 소제목으로 달았습니다. 실제 작업곡이기도 합니다^^
가오갤2 얼른 개봉했으면 좋겠습니다 눈물줄줄..ㅠㅠㅠ
아, 배경은 가오갤이 아니구 약간 AU입니다...ㅋㅋㅋㅋㅋ
01. 겨울왕국(Frozen) 『얼어붙은 심장』
잠이 덜 깬 상태였지만 피터 퀼은 자신의 몸이 매우 가뿐한 상태임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 몸뿐이랴. 마음도 무척이나 평온하고 만족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코 안으로 향긋한 냄새가 훅 끼쳤다. 푸우우, 만족스럽게 숨을 내쉬며 피터는 왼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 왼팔에 타인의 온기가 툭 걸려들었다.
그제야 피터 퀼은 잠들기 전의 상황이 조금 떠올랐다. 도수가 높지만 뒷맛이 개운했던 명품 술을 연거푸 들이마시고 누구와 함께 방으로 향했던 것 같았다. 머릿속에 새파란 이미지가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파란 드레스를 입었던 아름다운 여성을 에스코트해서 방으로 왔었나보다. 피터 퀼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은 채 미소 지었다.
방에 돌아와서도 그대로 잠들지 않았던 것 같다. 술을 더 시키고(시켰는지 가지고 온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게 뭐가 중요하리. 중요한 것은 방에 와서도 더 마셨다는 것이다.) 잔을 부딪치고 마시고 빈 잔에 술을 따라주고. 그러다가 어느새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것 같다. 다른 여성들과는 색다른 색이 칠해진 도톰한 입술을 슬쩍 만져보고 눌러보고, 그러다가 제 입술을 가져다 대서 꾹 눌렀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녀는 입맞춤조차 처음인지 흠칫 놀라 뒤로 얼굴을 빼려고 했다. 그런 그녀의 뒷목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피터는 맞붙은 입술이 살짝 떨어졌을 때 쉬이, 하고 달래주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는지 색이 짙어진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피터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겹쳤다.
한 손으로는 뒷목을 쓸어주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다독이며 피터는 천천히 그녀의 옷을 벗겼다. 사르륵 사르륵.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마찰음 사이로 옷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신음을 참으려는지 앙다문 입술 사이로 끙끙거리는 소리가 흘렀다. 그러나 간드러지는 신음성보다도 더 피터 퀼을 흥분시켰다.
그 어떤 밤보다도 황홀했다. 피터는 그 동안 갈고닦았던 모든 실력을 다 발휘해 그녀를 만족시켜주려 하였다. 그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인지 어떤 건지 알 수 없으나 끙끙거리는 소리는 점점 앓는 것 같은 신음으로 바뀌었다. 피터는 그녀의 팔을 제 목이 둘러주려고 하였으나 도리질까지 해가며 거부하는 바람에 그리 하지 못하였다. 그 점은 아쉽긴 했지만 다른 부분들은 꽤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괘념치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를 품에 안고 잠들었던 것 같다. 피곤한 모양인지 한숨을 쉰 그녀는 모로 누워 몸을 둥글게 말았다. 편안하게 자리를 잡는 모습에서 보건대 아마도 잠버릇인 듯했다. 피터는 그마저도 사랑스럽고 귀엽게 보였다. Good night. 뺨에 입을 맞춰주곤 그녀를 끌어안고 눈을 감자마자 푹 잠들었던 것 같다.
피터는 꼬물꼬물 움직여 잠든 그녀에게 더 다가갔다. 손끝에 걸렸던 온기가 손바닥, 팔뚝에서도 느껴졌다. 피터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하품을 하곤 그녀의 몸을 끌어 당겼다. 저보다 체온은 좀 더 낮았지만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피터의 손길을 느낀 것인지 그녀가 몸을 뒤척였다. 손바닥 가득히 닿는 피부 아래에 있는 탄탄한 근육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피터 퀼의 사고는 거기서 잠깐 정지했다.
반짝 눈을 떴다. 얼굴 위로 햇살이 가득 쏟아졌지만 피터는 눈을 깜빡거리지도 못하고 제 품을 내려다봤다.
반질반질한 파란색 두피가 한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고개를 뒤로 물리고 살폈다. 털 하나 나지 않은 매끈한 두피와 볼록한 이마는 날렵한 콧대와 이어져 있었다. 오뚝하니 솟은 콧대 양 옆으로 긴 속눈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새파란 뺨은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은 피부색보다 조금 더 짙은 푸른빛이 돌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살짝 들췄다. 코에 닿은 진한 체취가 피터 퀼의 심장을 꽉 움켜쥐는 듯 했다. 설마, 설마, 설마아. 피터는 아니기를 바라며 이불을 조금 더 들췄다. 판판한 가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그제야 피터는 제 품에 안겨 있는 이가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단련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복근, 그 앞에 제 것처럼 반쯤 단단히 일어선 것이 보였다. 그러나 피터 퀼을 더욱 울고 싶게 만든 것은 파란 엉덩이 위로 듬성듬성 하얗게 말라붙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을 때였다. 몇 번 눈을 깜빡거려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끝까지 갔구나. 끝까지 가면 안 되는 남자와.
품에 안긴 남자의 숨결이 목에 닿았다. 그 숨결은 따뜻했지만 피터 퀼은 제 목덜미부터 시작해 온 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다.
02. One Direction 『What Makes You Beautiful』
이틀 전. 그렇다. 피터 퀼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틀 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피터 퀼은 잔다르에 거주하는 모범적인 시민이면서 뛰어난 노바코어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본인 스스로의 설명일 뿐, 아마 그의 상사인 두 데나리안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을 이야기였다.
아무튼,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피터 퀼은 잔다르 출신의 노바코어이다. 노바코어에게 주어진 많은 일들 중 피터 퀼이 가장 좋아하는 업무는 시가지를 순찰하는 일로, 그가 신경 쓰는 대상은 여자, 예쁜 여자, 아름다운 여자, 매력적인 여자들이었다. 아주 가끔 남자들도 살폈지만 주로 여자들이었다.
그 날 역시도 피터는 잔다르에서 가장 유명한 도넛가게에서 사온 시즌 한정 도넛을 크게 베어 물며 주변을 탐색, 아니 신경 써서 살폈다.
“넌 또 어딜 그렇게 보고 있냐?”
“왔어요?”
도넛을 우적우적 씹으며 피터가 말했다. 터덜터덜 걸어온 데나리안 데이는 바이크에 엉덩이만 걸친 것처럼 기대어 서 있는 피터의 옆으로 와 나란히 섰다. 요즘 패션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어요. 또 뭐가 문제신가? 데이는 상자에서 화려하게 장식된 도넛을 꺼내면서 되물었다.
“봐요, 데이. 이 화창하고 좋은 날 저렇게 겹겹이 껴입고 긴 옷들을 입다니. 이건 날씨에 대한 모독이에요.”
“아가씨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의무가 있어.”
“뭐로부터요?”
“너 같은 불한당으로부터.”
말도 안 돼! 피터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데이를 돌아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이는 오늘따라 도넛이 더 달다는 둥 맛있다는 둥 이야기만 주절댔다. 근데 말이야, 하며 손에 들고 있던 도넛을 입에 쏙 밀어 넣은 데이가 피터를 향해 몸을 돌렸다.
“피터?”
“…데이.”
반 박자 정도 늦게 대답한 피터의 표정이 조금 진중하게 변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피터 퀼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데이는 피터보다 더 심각해진 표정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파랑새를 만난 적이 있어요?”
…엥? 왠 파랑새 타령?
“나…지금 파랑새를 만난 것 같아요.”
데이의 얼굴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너 도넛 잘못 먹었냐? 물어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으며 데이가 피터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피터는 바이크에서 슬며시 일어나 데이의 팔을 밀어내고는 갑자기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쟤가 먹은 도넛에 뭔가 발라져 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버리려던 도넛 상자를 슬며시 챙긴 데이가 피터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그는 성큼 걸어 나갔다.
피터 퀼은 자신감 넘치게, 그렇지만 오만해보이지 않도록 신경 쓰며 걸었다.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미스터…?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이의 앞에 선 피터는 잔다르의 시가지를 따뜻하게 비춰주는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오른쪽을 살피던 시선이 피터에게로 고정되었다.
오-마이-갓.
보라색과 파란색, 그리고 검은색이 오묘하게 어우러진 눈이었다. 그 위에 드리워진 긴 속눈썹 때문에 그림자가 져 눈동자의 색은 더욱 깊어 보였다. 매끈한 파란 뺨은 금가루를 뿌린 듯 반짝거렸다.
“아까부터 계속 이 주변을 맴도는 것 같은데…길을 잃으신 건 아닌가 걱정이 되더군요.”
“…….”
“어, 미스터?”
남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미소가 가득한 피터의 얼굴 위로 걱정이 스쳤다. 물끄러미 피터를 바라보던 이는 손을 들어 이마까지 덮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오-오-마이-갓.
햇살 아래에 완전히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후드에 가려져 있을 때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피터의 머릿속에서 폭죽이 팡팡 터졌다. 흠흠, 헛기침을 한 피터는 다시금 표정을 정리하고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잔다르 사령부를 찾고 있다.”
자연스러운 하대였지만 피터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남자의 목소리에 더욱 심장이 빠르게 뛰어 죽을 판이었다. 그러나 뛰어난 노바코어(자칭)답게 피터 퀼은 남자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두근대는 마음 뒤쪽에서 의아함이 고개를 쏙 내밀었지만 피터는 오히려 그 곳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곳이라는 점에 더 무게를 두기로 했다.
“아, 사령부 말씀이시군요. 그 곳이라면 제가 안내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물론 미스터가 괜찮다고 하시면요.”
제발, 제발. 고개를 끄덕여줘! 피터는 애절한 눈빛을 하며 웃었다.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 위로 고민의 빛이 스쳤다. 억만 년의 시간이 흐른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피터는 남자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남자를 자신의 바이크가 있는 곳으로 안내를….
아, 맞다. 나 오늘 바이크 타고 나왔지.
망했다. 화사하게 피었던 피터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어쩌면 좋지, 열심히 고민을 하던 차에 삑삑, 호출이 왔다.
“앗, 이런. 급한 호출이네요. 죄송해서 어쩌죠?”
“…….”
“죄송합니다. 제가 안내해드린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대신 제가 믿음직한 분께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흠.”
그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뒤 피터는 재빠르게 데이에게 달려갔다. 도넛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패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통신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데-이! 그의 팔을 툭 치며 피터가 활짝 웃었다.
“왜?”
“진짜 미안한데 데이, 저 사람을 사령부로 안내 좀 해주시겠어요?”
“뭐? 사령부로?”
데이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 피터를 부담스럽다는 듯 쳐다봤다.
“사령부는 왜 간다는 거야?”
“몰라요. 그건 나중에 알아봐도 되요. 빨리요, 데이! 나 호출 받아서 가야해요. 이번 시즌 한정 케이크 사줄게요!”
거 참. 데이는 머리를 벅벅 긁고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주먹을 꽉 쥐고 기뻐하던 피터는 바이크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저 사람이에요. 피터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린 데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를 쳐다봤다. 그리고 곧, 데이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갔다.
“야, 피ㅌ….”
“부탁해요, 데이!”
데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피터는 바이크를 타고 조금 멀찍이 서서 둘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거 내 패드예요. 잘 가지고 있어요. 저기 있는 내 동료가 당신을 사령부까지 데려다줄 거예요. 왼쪽 눈을 찡긋하며 헬멧을 쓴 피터가 남자의 손에 자신의 패드를 들려주고는 그대로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굉음을 내며 빠르게 사라진 피터를 바라보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피터의 동료, 데이를 쳐다봤다. 그는 울고 싶다는 얼굴로 남자에게 경례했다.
그리고 약 3시간 뒤, 피터 퀼은 죽을 상을 한 두 데나리안과 이마에 핏줄이 단단히 선 노바 프라임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패드를 돌려받았다. 크리 제국의 왕자, 로난 디 어큐져에게서.
03. Redbone 『Come And Get Your Love』
“말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물어보지 않은 네 탓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군.”
“아니 그러면, 그렇게 후드 푹 뒤집어쓰고 있는데 내가 어찌 압니까? 그리고 기분나빠하지 마요. 난 정말 당신 얼굴을 몰랐어요.”
이야기야 많이 들었지만. 접시 위의 고기를 포크로 쿡쿡 찌르며 피터가 투덜댔다. 그래, 그렇다고 해두지. 맞은편에 앉은 로난은 대충 대꾸를 하며 식사를 마쳤다.
1시간 전, 피터 퀼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자마자 잔뜩 화가 난 데나리안 살에게 귀를 잡혀 끌려갔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지 아냐며 엄청난 잔소리를 듣고 피터가 들어간 곳은 노바 프라임의 집무실이었고, 그 곳에서 피터는 낮에 만난 파랑새 같은 남자를 다시 만났다. 우아하게 포장된 노바 프라임의 잔소리를 들으며 피터는 남자를 쳐다봤다. 소파 깊숙이 몸을 묻고 편하게 앉은 그가 시선만 들어 피터를 바라봤다. 낮에 봤을 때와는 달리 눈 주변과 뺨이 까맸다. 위압감은 있었으나 나름 순해보였던 낮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역시 화장의 힘이란 위대하구나, 같은 생각을 하던 피터의 귀로 어떤 단어가 걸려들었다. 화들짝 놀란 그는 새된 소리를 내며 되물었다.
‘자네가 책임지고 왕자가 잔다르에 머무르는 동안 안내를 맡아달라고 했네.’
‘하지만 프라임, 그런 중요한 일을 제가….’
‘왕자는 자네를 지목하더군. 아주 친절하게 자신을 도와줬다면서 말이야.’
눈에서 넘실대는 불길이 훅 튀어나올 것 같았다. 피터는 어깨를 으쓱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고 나니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어 로난과 함께 사령부 식당을 찾게 된 것이다.
어쩌면 잘 된 일이지. 피터는 옆에 있던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생각했다. 어차피 처음 봤을 때부터 관심이 있었던 상대였으니. 그가 임무를 다 마무리하고 제국으로 돌아갈 때나 아쉬울까.
…많이 아쉽긴 하겠다. 고기를 쿡쿡 찌르던 손길이 조금 느려졌다. 곰곰이 접시 위의 고기를 바라보며 생각을 하던 피터가 고개를 들었다.
“미스터 로난.”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로난의 시선이 피터에게 향했다. 포크를 내려놓고 팔을 포개어 테이블에 올려둔 피터가 씩 웃었다.
“뭐 보고 싶은 거라던가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생각해본 적은 없군.”
“에이, 그러지 말고요. 사절단 일이 재미있지도 않을 건데. 계속 일만 할 수도 없잖아요.”
로난은 그런 피터를 가만히 바라봤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시선이 제 얼굴에 머무르는 것이 영 쑥스러워 피터는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테이블 위로 떨궜다. 네가 알려주고 싶은 것은 뭐지?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로난의 목소리에 피터가 다시 고개를 휙 쳐들었다.
“내가 알려주고 싶은 거요?”
“그렇다.”
“음….”
턱을 쓸면서 미간을 찌푸린 피터가 생각에 잠긴 동안 로난은 직원이 가져다 준 후식을 먹었다. 흐음, 소리를 내며 식당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던 피터는 로난을 바라봤다. 내일 만찬 전까지 시간이 비나요? 민트와 초콜릿이 섞인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밀어 넣은 로난이 수저를 문 채로 피터를 쳐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네요! 테이블을 탁 두드린 피터는 아까보다 훨씬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포츠 좋아해요?”
04. 코부쿠로(コブクロ) 『Blue Bird』
보이진 않았지만 경기장은 사람보다 함성으로 가득 채워진 느낌을 주었다. 로난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열광하는 잔다르인들을 살펴보다 푸릇푸릇한 잔디가 깔린 운동장을 바라봤다.
“이해를 할 수 없군. 잔다르의 기술력이 뒤떨어지진 않을 텐데.”
“그렇죠. 어디가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장비들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저렇게 맨몸인거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보는 로난의 얼굴에 웃음을 터뜨린 피터는 자연스럽게 그의 등을 두드렸다.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에 로난은 피터의 팔을 쳐다봤다가 다시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피터는 그가 아닌 운동장을 쳐다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수트, 스타 블라스터, 다양한 함선들과 무기들. 그것은 우리들을 도와줄 수는 있을지언정 무의식에 있는 힘을 끌어내주진 못해요.”
“흠.”
“타고나기를 전투에 적합하게 타고난 당신들 종족과는 달리 우리는 스스로를 단련하지 않으면 안 돼요. 아무리 최첨단 무기들이 있고, 수트들이 있다 하더라도 말이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스포츠가 나왔다고 나는 생각해요. 그리고 무엇보다…즐겁잖아요. 보는 우리도 즐겁고, 선수들도 즐겁고.”
음…선수들이 즐거울지는 잘 모르겠네요. 고개를 갸웃하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는 피터를 물끄러미 보던 로난은 다시 운동장을 쳐다봤다.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얇은 티셔츠와 바지, 니삭스를 무릎 아래까지 끌어 올린 것이 다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힘차게 땅을 박차고 달리는 선수들의 움직임이 새롭게 보였다. 로난은 작은 공 하나를 두고 효율적이면서도 극한으로 치닫는 움직임들을 찾아보려 했다. 거친 태클과 몸싸움에도 그들은 일어나 달리고 달렸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타이밍을 느낀다. 로난은 타이밍을 깨닫는 저 찰나의 순간이 바로 전사로서 길러야 할 감각과 닮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군. 로난이 나직이 중얼거린 그 때, 회전을 멈춘 채 날아간 공이 그물을 흔들었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일어나 기뻐하고 환호했다. 로난 역시도 피터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을 치켜들고 함성을 지르던 피터는 몸을 휙 돌려 로난을 꽉 끌어안았다. 본능적으로 로난은 피터를 공격하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피터의 뒤에 있던 사람들도 주변의 사람들을 마구 끌어안고, 손바닥을 부딪치고, 키스를 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 다들 저렇게 하는 것인가. 확 터진 함성이 가라앉을 줄 모르는 경기장을 죽 둘러보며 로난은 어색하게나마 피터의 등 위로 제 손을 얹었다. 그의 몸은 따뜻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따뜻함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미스터 로난.”
“뭐가 고맙다는 거지?”
“오늘 정말 중요한 경기였어요. 결승전이었거든요.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길 확률이 얼아 안 되었는데 이겼어요. 우승이라니!”
피터는 핸들까지 팡팡 두드리며 좋아했다. 로난은 아마도 그가 느끼고 있는 기쁨의 정도가 작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느끼는 기분과 비슷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렇군. 좋아할 만 하겠군.”
“좋아할 만한 게 아니죠! 지금 나는 왕이라도 된 기분이라고요! I am the king of the universe!”
작은 전투가 은하 단위의 대규모 전쟁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처음으로 지휘했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 피터처럼 저렇게 기뻐했던 것이 생각난 탓이었다. 그 기억을 더듬고 있었던 탓에 로난은 피터의 말을 잠깐 놓쳤다.
“뭐라고?”
“로난 덕분이라고요.”
“…뭐가?”
“우리 팀이 승리한 거요.”
로난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했다. 그런 로난을 힐끗 본 피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해가 안 돼요?”
“그렇다.”
“음…미스터 로난은, 뭐랄까요.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어요. 파랑새 같다고요.”
“파랑새?”
“오, 오해하지 말아요. 내가 말하는 파랑새는 동화 속의 파랑새니까요.”
물론, 진짜 파란색 깃털을 가진 새도 있지만요. 로난의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것을 본 피터가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그 파랑새는 동화 속 남매에게 행복이 어떤 건지를 알려줘요. 물질적인 풍요로움만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죠.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며 꿈을 꾸는 것 자체가 바로 행복이라는 것을요.”
“그것과 네가 응원하는 팀이 이긴 것에 내가 영향을 미친 것이 무슨 상관이지?”
“미스터 로난, 행복을 추구하면서 하루하루 꿈을 꾸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
“아무 대답이나 해봐요.”
“…모르겠군.”
“에이, 재미없어라.”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은 피터가 투덜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미스터 퀼? 로난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참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생각하며 피터는 목을 가다듬었다. 어쩐지 얼굴에 열도 조금 오르는 것 같았다.
“희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희망?”
“그래요. 이렇게 계속 해나간다면 분명 나는 꿈을 이룰 것이고, 행복에 닿을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을 믿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언젠가 파랑새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길을 떠난 남매처럼.”
“그렇다면 네게 동화 속 파랑새는 무엇이지?”
“모든 것이에요.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면 언젠가 닿을 수 있는 모든 것. 내가 꿈꾸는 것들. 행복, 사랑, 기타 등등.”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로난의 얼굴 위로 당황이 스쳤다. 머릿속에서 쭉쭉 뻗어나가던 연결고리들이 순식간에 얽혀갔다. 그리고 도달한 결론에 로난은 더듬더듬 말했다.
“나를 보며 떠올렸다는 파랑새가…그렇다면 지금 그 말은….”
“네, 미스터 로난. 저 첫눈에 당신한테 반한 거예요.”
로난이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피터의 옆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런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로난은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새파랗게 빛나던 잔다르의 하늘 한 쪽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마치 피터의 얼굴처럼.
그리고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로난의 목덜미가 조금 더 새파란 빛을 띠었다. 피터는 미처 몰랐지만 말이다.
05. 하나자와 카에(花澤加繪) 『Sailor Star Song』
오랜만에 본 피터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그런 피터에게 데이가 슬쩍 다가왔다.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쳤는데? 그러나 피터는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진짜 큰 사고를 쳤냐?”
“…….”
“이봐, 피터. 그러지 말고 형님한테 말해봐.”
“데이, 나 차인 것 같아요.”
“에이, 난 또 뭐라고. 늘 있던 일이었잖아?”
“데이!”
“왜? 맞는 말이잖아?”
시커멓던 피터의 얼굴이 이번에는 새빨갛게 변했다. 얘가 이렇게까지 열을 올린 아가씨가 있었던가. 발바닥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피터 제이슨 퀼의 화려한 작업 역사를 더듬던 데이의 동작이 뚝 멎었다. 그러고 보니 얘가 요 며칠 동안 공을 들인 상대, 상대…가….
“아니지. 아니라고 해줘, 피터.”
“…뭘요.”
“크리 왕자한테 들이댄 거냐?”
“…….”
“아니지? 하하하, 네가 아무리 생각 없고 철이 없기로서니. 하하하!”
데이는 배를 잡고 시원하게 웃었다. 그러나 여전히 피터의 얼굴은 시커멨다. 웃음을 멈춘 데이가 심각한 얼굴로 피터의 어깨를 붙잡았다. “끝까지 갔냐?” 침묵. “그 때 그 만찬 때?” 끄덕끄덕.
“어쩐지. 어큐저도 죽상인 것 같더니 그런 일이 있었구먼.”
“네? 미스터 로난 얼굴 별로였어요?”
“그래. 만찬 이후로는 계속 저기압이더라고.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서 프라임도 찜찜해하셨지. 오늘 돌아가는 날인데도 표정이 별로 좋진 않더라.”
“네? 오늘 뭐요?”
“몰랐냐? 크리 제국에 뭔 일이 터졌는지 돌아오라는 통신이 왔어. 오늘 중으로 귀국하라고 말이야. 아마 한 30분 뒷면 출발할…야, 피터! 어디가?”
피터는 달렸다. 자신이 사랑하는 팀의 존경하는 레전드가 그라운드를 거침없이 누빌 때처럼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피터는 달렸다.
“미스터 로난!”
크리 제국의 율법에 따라 화려한 자수로 장식된 로브를 걸친 로난이 함선에 오르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피터는 로난을 똑바로 쳐다보며 계속 달렸다. 그런 피터를 막기 위해 크리의 전사들과 노바코어들이 몰려들었다. 피터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러나 가볍게 뛰어 올라 그들 사이에 내려 선 로난때문에 모두의 움직임이 멎었다.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해 멈추지 못하고 로난의 품에 폭 안겨버린 피터만 빼고.
“아하하, 고마워요.”
“여긴 무슨 일이지, 미스터 퀼.”
“무슨 일이긴요. 인사하러 왔어요.”
오해도 풀 겸. 피터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로난 앞에 똑바로 섰다.
“그 때, 만찬 이후에 일어난 일은 사고가 아니에요. 아 물론 당황해서 당신을 그냥 그렇게 보낸 건 잘못한 거였지만, 아무튼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당신과 하룻밤을 지낸 건 아니에요.”
“…….”
“말했죠. 당신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그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그 때 경기장에 데리고 간 것도 잔다르에 대해 알려주고픈 마음과 함께 나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었어요. 잔다르에 관심을 기울이는 만큼 나에 대헤서도 생각해 달라고 말이에요.”
그러니 미스터 로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선 피터가 로난의 뺨을 붙잡았다. 크리의 전사들은 자신들의 왕자가 공격을 받는 줄 알고 뛰쳐나가려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노바코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다시 와줘요. 그리고 나랑 정식으로 데이트해요.”
“…그러도록 하지.”
이번에는 로난이 먼저 피터에게 키스했다. 아주 잠깐 스친 그의 미소에 넋을 놓고 있던 피터는 곧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파랑새를 바짝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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