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한기와 함께 성큼 다가왔다. 이송 대기 중인 부상병들을 한 번 돌아보고 막사 밖으로 나온 브라이언은 입김이 몽글거리며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쏟아질 것 같은 별빛조차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늘 밤은 흐렸다. 늘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전장이지만 오늘따라 더하다는 생각을 하며 브라이언은 걸음을 옮겼다.
얼굴을 따갑게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부서지는 모래, 막사가 펄럭거리는 소리, 여러 가지 잡담들, 욕설과 음담패설. 아직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에 귀를 기울였다. 풀썩, 하고 무언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때였다. 어둠으로 더욱 짙어진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가벼운 차림이었지만 대충 무기가 될 만한 것을 꺼내어 들고는 소리가 난 곳으로 다가갔다.
누구지? 불러도 대답은 없었다. 누구냐. 두 번째 부름에 조금은 몸을 움직인 것 같았다. 어쩐지 익숙한 머리통처럼 느껴지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가자 더욱 형체가 뚜렷해졌다. 혹시 트럼블리냐? 움직였다고 생각했던 그림자속의 그림자가 잠깐 멈칫하는 듯 했다. 잘못 본 건가? 상체를 조금 낮추며 미간에 힘을 줬다. 무언가 있는 듯 없는 듯. 브라이언은 어쩔까 하다가 조금 더 다가가보기로 했다. 파스락, 하고 발밑의 모래가 미끄러지는 순간,
"윽!"
그림자는 재빨랐다. 날렵한 동작으로 브라이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다리를 걸어 그를 넘어뜨린 후 배 위로 올라타 앉았다. 땅에 머리를 찧는 바람에 별빛이 부서지듯 눈앞이 번쩍였다. 잠깐 동안 눈을 감았다 뜨자 검기만 하던 형체에 익숙한 얼굴이 그려졌다.
"트럼블리, 너 지금 이게 무슨..."
"닥."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의 목소리가 그러하듯, 트럼블리의 목소리는 낮았다. 코에 닿는 그의 체향에 피비린내가 섞여있는 것 같아 브라이언은 저도 모르게 킁킁거렸다. 으흐, 킥킥. 입김과 함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지만 크게 뜨여진 트럼블리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질 않았다.
"너 무슨 짓을 하고 온 거냐."
"그렇구나. 닥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 ..."
"빌어 처먹을 애새끼 하나가 분대 분위기 다 흐리고, 존경하는 아이스맨을 빡치게 한다고."
아니에요? 응? 트럼블리가 고개를 조금 더 숙이자 피비린내가 더욱 짙어졌다. 어둠 속에서 트럼블리의 얼굴을 뒤덮은 것이 조그맣게 반짝거렸다. 사고를 쳤나보군. 한숨을 내쉰 브라이언은 일부러 느리게 손을 들었다. 뚫어져라 브라이언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는 트럼블리는 그의 손이 자신의 얼굴에 닿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브라이언은 확신했다. 손 끝에 묻어나는 것은 분명 피였다. 점점 굳어가는.
"나는 개가 싫어요."
"... ..."
"나를 사랑해달라고 꼬리치는 것도 싫고, 죽어라고 쳐 맞아도 주인이 좋다고 꼬리치고 헥헥거리는 것도 싫어요."
"... ..."
"시키는대로 복종하고, 따르고. 그러다가 잘못되면 쳐 맞고. 버티다 못해 살기 위해서 그렇게나 좋아하는 주인 손을 물어버리고. 그런데 더 싫은 건요, 닥."
내가 그런 개새끼보다도 더 못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죽였어요. 총으로 쏘고, 칼로 찌르고, 발로 차고. 죽였어. 내가 나한테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개새끼한테 그랬어. 게다가 이곳의 생물들은 다 우리의 적이잖아. 안 그래요? 적을 하나라도 빨리 없애야 하는 거니까. 응? 닥, 내가 그랬어. 어떻게 생각해요? 트럼블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조곤조곤 속삭이며 브라이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점점 트럼블리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가는 듯 했다. 그런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그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브라이언은 인상을 썼다가 이내 표정을 풀고는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웃었다.
"미친놈. 브랫 말은 어디로 알아 쳐 먹은 거냐?"
"... ..."
"분대장 말도 알아 처먹지 못하는 그런 새끼였냐? 조온나, 그러고도 브랫 밑에 염치도 없이 잘 있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뻔뻔한 것 하나는 인정해주지.“
“... ...”
“하지만, 멍청한 애새끼야. 생각해라. 우리는 전쟁을 하러 온 거지 살육을 하러 온 게 아니다. 함부로 죽이지 마라. 암만 개같은 명령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너 자신을 포함해서. 함부로 죽어야 하는 것은 없다. 초점이 나간 듯 했던 트럼블리의 눈동자가 생기를 되찾을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하, 하하. 평소의 그의 목소리처럼 높아진 웃음소리가 작게 터졌다. 진짜, 늘 가르치려드는 꼬락서니, 마음에 안 들어. 시발. 늘어지는 목소리에 맞춰 느리게 깜빡거리던 눈이 결국 꾹 감겼다. 그리고 입술이 스칠 듯 가까이 다가왔다가 털썩, 트럼블리의 몸이 살짝 옆으로 비켜나 쓰러졌다. 이봐, 야. 이 새끼가. 트럼블리! 혹여 누가 들을까 소리를 치지도 못하고 그의 몸을 흔들던 브라이언은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 잠이라도 든 모양인지 귓가에 들리는 트럼블리의 숨소리는 매우 규칙적이었다.
하여튼, 도움 안 되는 병신이. 끄응, 이를 악물며 잠든 트럼블리의 어깨를 붙잡고 그를 옆으로 밀어냈다. 길게 한 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켜 앉은 브라이언은 하늘을 잠깐 바라봤다가 옆에 누운 트럼블리를 바라봤다. 새끼, 쳐 자는 모습은 진짜 애새끼 같네.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핏물을 가만히 바라보던 브라이언은 제 머리에 두르고 있던 두건을 풀어냈다. 제 품을 뒤적거리다 찾는 게 없었던 모양인지 잠든 트럼블리의 품을 뒤졌다. 곧, 수통 하나를 찾아냈고, 브라이언은 망설임 없이 수통을 열어 제 목을 좀 축인 뒤 남은 물을 두건 위로 쏟아 부었다.
미우나 고우나, 혹은 모자라거나. 그렇다 하더라도 내 새끼인 건 어쩔 수 없다. 아주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는 없지만. 정말이지 여러 번 손이 가게 한다니까. 젖은 두건으로 조심스럽게 트럼블리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며 브라이언은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