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8일 개최된 퍼시픽 림 배포전 "태평양 드리프트"에 무료 배포된 내용을 공개합니다.
행사가 끝난지 근 2개월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야 공개를 하다니 저도 참 양심이 없지요ㅠㅠㅠㅠㅋㅋㅋㅋ 하지만 오늘에서야 배포본을 나눠드릴 분들께 모두 전달을 해서 공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본 내용은 영화 퍼시픽 림의 2차 창작입니다. 중간 중간 원작 소설 및 영화 내용을 참고하긴 하였으나 원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쓸 때에는 기동전사 건담 제08소대의 엔딩곡 '10 years after'와 드래곤플라이의 '사진'을 들었습니다:)
1.
눈앞의 낡은 건물을 바라보던 롤리는 시선을 내려 메모에 적힌 주소를 확인했다. 카이주와의 오랜 전쟁이 끝나고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복구 작업의 손길이 아직 미치지 못한 이 건물이 자신의 찾는 곳이었다. 그는 잘못 건드리면 무너질 것 같은 유리문을 조심히 밀었다. 먼지가 잔뜩 묻어 더러운 유리문과는 달리 건물 안쪽은 깨끗했다.
301호라고 했지? 왼쪽 어깨에 걸친 백팩을 고쳐 매곤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오르는 중에도 롤리는 몇 번이나 다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롤리는 한 계단을 남겨놓고 걸음을 멈췄다.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이를 악물었다가, 숨을 길게 내쉬고는 결심한 듯 정면을 바라봤다. 마지막 남은 계단을 올라 왼쪽으로 꺾자 301호가 보였다. 문패는 없었지만 롤리는 알 수 있었다. 주소가 적힌 메모의 맨 끝에는 ‘가장 화려하고 난잡하게 꾸며진 문’ 이라는 추신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똑똑똑. 세 번 노크를 하고 기다리자 문이 열렸다. 물감과 시너 냄새가 확 끼쳤다. 빨간 물감이 묻은 검은 뿔테를 밀어 올리며 나온 여자가 롤리를 보며 빙긋 웃었다.
“아, 미스터 베켓?”
“네, 안녕하세요.”
“캐롤라인 레이테에요. 헤매지 않고 잘 찾아오셨네요. 들어와요.”
문을 활짝 열고 한 쪽으로 비켜선 캐롤라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여러 크기의 캔버스가 세워져 있었고, 그 사이에 깎다 만 나무, 제멋대로 주물러진 점토 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다.
“좀 정신이 없죠? 미안해요. 나름 치운다고 한 건데도 이 모양이네요.”
“아니에요. 제 방보다 깨끗한데요?”
“아하하, 그래요?”
커피가 좋으세요, 아니면 차가 좋으세요? 하는 캐롤라인의 물음에 롤리는 차라고 답했다. 포르르 물이 끓더니 곧 향긋한 허브향이 퍼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롤리는 그녀가 내려놓은 컵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힘이 가해졌는지 올록볼록한 형태를 한 컵에서 따끈한 김이 올라왔다. 마치 손가락으로 물감을 바른 듯 찍힌 무늬 위에 검지를 올리자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쁘지 않죠? 그렇게 꾸며놓는 것도요.”
“아, 그럼….”
“네, 제가 만든 컵이에요. 캔버스만 너무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갑갑해져서요. 그럴 땐 점토도 주물러보고, 그릇도 만들어보고 하거든요.”
“그렇군요. 잘 마실게요, 미스 레이테.”
“그냥 캐롤이라고 부르세요.”
저도 롤리라고 편하게 불러도 되죠? 앞치마에 손을 대충 문질러 닦은 캐롤라인이 롤리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차를 한 모금 마신 롤리가 가방을 뒤적여 꺼낸 무언가를 쭉 밀었다. 오, 하고 입술을 동그랗게 만든 캐롤라인은 팔을 뻗어 그가 내민 것을 집었다. 한쪽 귀퉁이가 낡고 구겨진 작은 사진이다. 세피아 효과가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사진 속에는 두 남자가 정답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제 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머리 위에 손가락을 얹은 형태로 사진을 잡아 롤리 쪽으로 돌렸다. 호록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옆은….”
“제 형인 얀시에요.”
그렇군요. 캐롤라인은 다시 사진을 내려놓고 반 바퀴 빙글 돌렸다. 사진 속 얀시를 쓰다듬는 손가락에는 매니큐어 대신 물감이 말라 있었다. 롤리는 그 손톱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2.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요. 음…오기 전엔 할 이야기들이 많다고 생각해서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좀 고민했어요. 하핫, 시작이 어렵네요. 조금, 마음도 무겁고요. 네? 아, 머리카락이요? 사진 색깔이 그래서 좀 구분하기 어렵죠? 저랑 비슷한 금발로 보이지만 얀시의 머리는 뭐랄까…조금 더 진하다고 해야 할까요. 음…네, 확실히 진해요. 그런데도 가끔은 옅은 밀빛같다는 생각을 해요. 특히나 바닷가 같은 곳에 가면요, 얀시의 머리가 정말 반짝거려요. 물에 젖어서 더 그런지 모르겠지만요.
아, 머리카락이라고 하니까 어릴 때 일이 생각나네요. 저희 가족은 여행을 자주 다녔죠. 그래서 우리는 생일도 여행지에서 보낼 때가 있었어요. 얀시는 11살 생일잔치를 부다페스트에서 했어요. 얼마나 신났는지 몰라요. 친구들과 보내는 왁자지껄한 생일파티는 아니었지만 다른 나라에서 보내는 생일은 그만큼의 특별함이 있더라고요. 특히 도나우 강에 갔을 때 신난 얀시는 막 다리 난간에 올라가서 소리를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아무튼 아침부터 밤까지…아니, 얀시가 잠들 때까지 정말 축제 같았어요.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얀시 베켓 페스티벌!
그런데 너무 신났던 모양이에요. 저녁을 다 먹고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본다고 테라스에 있는데 갑자기 얀시가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내더니 불을 붙였어요. 그리고 팔을 높이 들고 붕붕 흔들면서 이렇게 외쳤어요. “롤리! 우리는 슈퍼 히어로야!” 덩달아 신이 난 저도 같이 팔을 흔들면서 방방 뛰었어요. 우리는 슈퍼 히어로! 하면서요. 하하, 상상이 가요? 11살, 8살짜리 남자애들이 라이터를 들고 테라스며 거실이며 마구 뛰어다니는 모습 말이에요. 그러다가 잘못해서 얀시의 머리카락에 불이 붙었어요. 깜짝 놀란 얀시가 비명을 지르며 라이터를 집어 던졌고, 저도 어머니를 부르며 소리쳤어요. 놀란 어머니께서 물병을 들고 오셔서 얀시의 머리에 부었죠. 아버지는 로비에 전화를 해서 구급차를 불렀고요. 다행히 많이 다치진 않았어요. 뭐, 얀시와 저는 울고 부모님은 화내시고 난리도 아니었지만요. 얀시와 함께 보낸 생일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시끄럽게 보낸 생일이었을 거예요. 한동안 얀시는 머리에 하얀 거즈를 붙이고 다녔어요. 그 자리가 마치 땜빵 같아서 놀려댔다가 얀시한테 엄청 맞았었죠. 참 잊을 수 없는 생일 중 하나이고…다시 돌아가 보고 싶은 날이기도 해요.
3.
지금도 가끔 눈을 감으면 드리프트에 빠질 때가 있어요. 여러 가지가 스쳐 지나가요. 그렇게 기억이 마구 지나갈 때 잘못하면 아예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어, 이해가 잘 안 되시죠. 우리끼리는 그것을 앨리스의 토끼를 쫒아간다고 표현을 하는데…어떻게 알려드려야 할까. 흐음, 동화 속에서 앨리스가 토끼를 쫒다가 이상한 나라로 가게 되잖아요. 네. 네네. 맞아요. 앨리스는 여러 도움을 받아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오지만 우리는 그런 조력자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토끼를 쫒아가게 되면 깨어날 수 없어요. 영원히 드리프트 상태에 머물게 되죠. 아무튼, 그 토끼를 쫒지 않기 위해 정신을 조금 집중하면 어느 순간 혼란스럽던 주변이 정리가 되요. 그러면…그러고 나면 얀시를 만날 수 있죠. 정확히는…제 기억 속의, 과거의 얀시를요.
얼마 전에는 얀시의 등을 봤어요. 저는 그 뒤에 서 있었죠. 어디를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드리프트에 빠졌구나, 하고 깨달은 동시에 얀시를 보았거든요. 전 형의 등을 좋아해요. 한 번도 얀시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그 등은 절 정말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얀시의 등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갑자기 인식하지 못했던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죠. 해변이었어요. 얀시가 가장 좋아했던 뉴질랜드의 해변이요.
아버지께서 여행을 좋아했다고 말씀드렸었죠? 그 중에서 제일 오래 머물렀던 곳이 뉴질랜드였어요. 거의 1년? 하하, 네, 그 정도면 여행이 아니죠. 아버지의 업무 때문에 더 오래 머물렀던 것 같기도 해요. 여하튼, 뉴질랜드에서 지내던 동안 얀시는 서핑에 푹 빠졌어요. 높게 치는 파도를 이겨내는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아닌 척 해도 얀시는 승부욕이 있는 편이었거든요. 게다가 센스도 좋아서 서핑을 금방 배웠어요. 어머니를 졸라서 산 보드를 자기가 직접 꾸밀 정도로요. 저요? 하하, 저는 서핑보다는 수영이 더 좋았어요. 그래서 얀시가 서핑을 가는 날이면 저는 모래사장에 앉아 있거나 수영을 하거나 그랬어요.
가벼운 스트레칭을 해주고 보드를 옆에 껴요. 롤리, 다녀올게! 그렇게 말하고 바다로 달려가죠. 보드에 몸을 싣고 헤엄치다가 파도가 올 때까지 기다리죠. 그리고 곧 기다리던 파도가 오면 얀시는 타이밍을 보다가 보드 위에 올라서요. 팔을 뻗어 중심을 잡고는 파도를 타는 거예요. 몇 번은 바다 속으로 고꾸라질 때도 있지만 얀시는 포기하지 않아요.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여러 번 도전해요. 그렇게 실컷 서핑을 하고 바다에 들어갔을 때처럼 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돌아오죠. 물에 젖어 더욱 진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환하게 웃어요. 저는 그런 얀시를 볼 때마다 어릴 때 즐겨 봤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 아레스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럼요. 얀시에겐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하하하, 동생들은 좀 그렇잖아요? 괜히 형들이 우쭐대는 거 보기 싫은 거요. 저도 그랬어요. 게다가 그 때의 전 얀시보다 덩치가 조금 작았거든요.
하하, 이해가 빠르시네요, 캐롤. 네. 얀시는 나중에 드리프트를 하면서 저의 그런 생각들을 모두 알게 되었죠. 오, 꼬맹아, 형이 그렇게 멋있냐? 하면서 어찌나 우쭐대던지. 거짓말도 못하는 상황이니 뭐 어쩌겠어요. 그냥 웃고 말았죠.
…네. 맞아요. 얀시와 저에겐 다른 말이 필요 없었어요. 드리프트를 통해서 다 알 수 있었으니까요. 가끔은 그게 제일 후회돼요. 시시껄렁한 잡담 말고, 형을 믿고 많이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말이에요.
4.
아, 고마워요. 안 그래도 목이 마르던 참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그림 그리던 중에 나오셨나 봐요. 손에 물감이요. 괜히 방해한 건가 싶어서요. 하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얀시는 방해받는 걸 좀 싫어했거든요. 맞아요. 승부욕도 승부욕이지만 한 번 집중하면 움직이지 않고 쭉 하는 스타일이었거든요.
특히 얀시가 방해받기 싫어한 건 잘 때였어요. 예거 파일럿이 된 이후로는 마음 편하게 잘 때가 없었죠. 카이주는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었고, 몸과 정신은 계속 단련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얀시는 잘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정말 푹 자려고 했어요. 불안정한 수면패턴 때문에 잠드는 것도 오래 걸리다보니 도중에 깨우거나 하면 엄청 짜증을 냈어요.
얀시와 마지막으로 상대한 카이주는 나이프헤드라는 녀석이었어요. 새벽 2시였죠. 제가 먼저 일어나서 옷을 꿰어 입고 잠든 얀시를 깨웠어요. 네, 엄청 짜증냈죠. 그래도 출동 명령이니까 군말 않고 일어났어요.
그 때의 저는 매우 들떠 있었어요.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와 멀리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바다 위에 폭풍이 몰아치면 거기서 벗어나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하잖아요. 우린 반대였어요. 아무리 심한 폭풍이 몰아쳐도 가장 안전한 곳에 있었으니까요. 예거의 안에 있으면, 집시의 안에서 얀시와 함께 있으면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았어요.
오만했죠. 카이주의 피를 뒤집어써서 죽을 뻔 했지만 살아남은 적이 있거든요. 그때를 교훈 삼아 좀 더 대비를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카이주의 진화에 맞춰 우리도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죠.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진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던 거예요.
…휴지 좀 주시겠어요? 하하, 미안해요. 이런 꼴사나운 모습이라니. 흠흠…그 뒤는 정말 정신없었어요. 얀시는 끝까지 외쳤어요. 형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어요. 살아남으라고. 넌 할 수 있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나이프헤드의 손에 잡혀 멀리 사라지면서도 얀시는…얀시는 끝까지 제 머릿속에서 말했죠. 네, 그 때도 우린 드리프트 상태였어요. 끊임없이 얀시의 생각이 흘러 들어왔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갑자기 얀시의 생각이 끊어졌어요. 그 때 깨달았죠. 아, 얀시가…얀시가…. 괜찮아요, 잠시…잠깐만요. ……. 후우, 미안해요. 하하, 캐롤이 미안할 건 없죠. 아무튼, 얀시의 생각이 뚝 끊어지니까 내 안에서는, 뭐랄까요, 영혼이 쑥 빠져나간…도저히 메울 수 없는 구멍이 생긴 기분이었어요. 네, 저는 그 때 죽었던 거예요. 얀시와 함께. 슬픔, 절망, 공포는 곧바로 분노가 되었죠.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모든 것이 끝난 뒤였죠.
얀시의 말대로 살아남았지만 나에게 남은 것은 없었어요. 그래서 짐을 다 싸들고 나와 버렸어요. 카이주 방어 장벽 공사장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일만 했어요. 얀시와 집시에게 사죄하면서요. 그것이 혼자 살아남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단 걸 다시 돌아가서 깨달았어요. 수리된 집시를 보고 있자니…여러 가지 생각이 밀려들더라고요. 멍청한 꼬맹이, 하는 얀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온 몸을 짓누르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는 기분이었어요. 그래서인지 그 날은, 집시와 재회한 그 날은 정말 푹 잤어요. 얀시를 잃은 뒤로는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꿈을 꿨던 것 같아요. 드리프트 상태였는지 아니면 정말 꿈이었는지…지금도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얀시가 나왔어요. 집시의 어깨에 앉아 절 보고 웃고 있었죠. 돌아온 걸 환영한다면서요.
후,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지루하진 않았어요, 캐롤? 하하하. 얀시를 만났다면 아마 캐롤도 좋아했을 거예요. 네, 얀시도 당신을 만나면 좋아했을 거예요. 얀시는 미인을 좋아하거든요. 진짜로요! 어…택배가 좋을 것 같네요. 네네. 주소 적어드릴게요. 사진도 그 때 같이 택배로 보내주세요. 고마워요. 잘 부탁해요, 캐롤.
5.
차에서 내리기 전, 롤리는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고쳐 맸다. 미소도 한 번 지어보면서 얼굴 근육을 풀어보던 그는 결국 핸들 위로 팔을 포개어 얹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고르는 소리만이 적막한 차 안을 울렸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고개를 든 롤리가 옷매무새를 다시 정리했다. 뺨을 두어 번 두드리고 눈을 깜빡거린 그가 싱긋 웃고는 차에서 내렸다. 조수석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자리에 놓여 있던 상자와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그들을 영원히 기억합니다.] 라는 문구가 붙어 있는 공원의 입구로 들어서며 롤리는 심호흡을 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카이주와의 전쟁 동안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묘지공원이었다. 평일인 탓인지 공원은 한적했다. 서늘한 바람만이 불어오는 공원을 롤리는 조용히 걸으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 전쟁도, 고통도 없을 겁니다. 소리가 되지 못한 그의 마음은 한숨과 섞여 흘러나와 불어온 바람에 실려 멀리 퍼졌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예거 파일럿들의 묘비가 있다. 롤리는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동료들에게 인사했다. 스태커 펜테코스트, 척 한센, 알렉시스와 사샤, 웨이 3형제, 그 외의 많은 예거 파일럿들의 묘비들을 손바닥으로 쓸며 걷던 롤리의 발걸음이 한 곳에서 멈췄다.
YANCY BECKT 1995.11.07. ~ 2020.02.29. |
롤리는 왼쪽 무릎을 바닥에 꿇으며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놨다.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도 가지런히 정리해 묘비 앞에 내려놨다. 조그맣게 한숨을 쉰 그는 손바닥을 펼쳐 얀시의 묘비에 가져다 댔다. 화강암의 냉기가 그대로 전해졌지만 롤리는 손바닥을 떼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이름이 새겨진 부분을 손끝으로 더듬는다. 알파벳을 따라 느리게, 느리게.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들이 서로의 몸을 부대끼며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롤리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에워싼 나무들을 돌아보곤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얀시의 이름을 더듬었다.
“…얀스, 오랜만이야. 괜찮게 지내고 있어?”
목소리가 조금 떨린 것 같아 롤리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왼쪽 무릎에 올려뒀던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묘비를 짚었던 손을 거둬 눈가를 가렸다. 코를 훌쩍이며 눈가를 훔친 롤리는 부러 밝은 목소리로 형의 이름을 불렀다.
“난 잘 지내. 보다시피. 아, 그리고 선물도 가져왔어. 어제 택배가 도착했더라고. 같이 보려고 뜯지도 않은 상태로 가져 왔지.”
보여? 여기 택배용지가 붙어 있는 거? 작게 웃은 롤리가 상자를 기울여 묘비 쪽을 향하게 했다. 그리고 바닥에 놓은 뒤 테이프를 죽죽 뜯어갔다. 안에는 포장용 박스 두 개가 들어있었다. 이거 꼭 러시아 인형 꺼내는 것 같지 않아, 얀스? 킥킥 웃은 롤리가 먼저 크기가 있어 보이는 박스를 꺼냈다. 깨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둘러진 에어캡을 뜯어내고 박스의 뚜껑을 열었다. 8절 스케치북 크기의 그림이 들어 있는 액자를 꺼낸 롤리는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11월, 가을의 햇살이 롤리가 들고 있는 액자 위로 쏟아졌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그림에는 여름의 해가 떠 있었다. 그 아래에서 빛나는 바다, 번쩍이는 모래사장, 그리고 햇살보다 환하게 웃고 있는 얀시가 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에 젖은 금발, 파란 눈동자,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짓고 있는 입술. 서핑을 막 끝내고 나왔는지 그의 온 몸을 감싼 슈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얀시가 들고 있는 서핑보드에는 형제가 함께 조종했던 집시 데인저, 함께 싸웠던 스트라이커 유레카, 크림슨 타이푼, 체르노 알파, 그리고 (어떻게 찾았는지 궁금하기까지 한) 코요테 탱고가 귀엽게 그려져 있었다. 롤리는 입을 틀어막았다. 덜덜 떨리는 손등 위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마음에 들어, 얀스?”
난 항상 형이 서핑 하던 모습이 참 좋았어. 뭐든 이겨낼 것 같았거든.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롤리는 액자를 돌려 얀시에게 보여줬다. ‘당신의 추억을 그려드립니다.’ 라고 소개받은 대로, 캐롤라인은 롤리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그려주었다.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편하게 앉은 롤리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액자를 무릎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자그마한 박스를 꺼내었다. 「롤리에게. 이건 선물이에요♡」라는 메모를 눈을 읽으며 그것을 열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작은 스케치 노트였다.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펼친 롤리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가볍게 스케치해본 것들인데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어요. 소중한 기억이잖아요? 그래서 이것도 같이 넣어봤어요. 선물이에요. 형이 항상 곁에 있기를 바랄게요. - 캐롤」
손에 묻은 물기가 스케치 노트에 붇지 않도록 조심하며 롤리는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어린 형제가 유명한 코믹스의 히어로 복장을 하고 손에서 불꽃을 피워내며 붕붕 휘두르는 모습, 수영복 차림으로 가볍게 스트레칭 하는 얀시, 서핑을 즐기는 얀시와 그런 그를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 아카데미 졸업식 때의 형제, 겨우 잠이 든 얀시의 얼굴, 억지로 깨워졌는지 짜증스러움이 역력한 얀시의 얼굴, 집시 데인저의 손바닥 위에 서 있는 롤리와 그 어깨에 날개를 달고 앉아 있는 얀시. 다양한 얀시와 롤리가 작은 스케치 노트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
롤리는 스케치 노트를 덮고 품 안에 끌어안았다. 둥글어진 등이 미약하게 떨렸다. 얀시, 얀스. 눈물과 그리움으로 잔뜩 적셔진 목소리와 함께.
등의 떨림이 멎어갈 때 쯤, 롤리는 고개를 들었다. 스케치 노트를 다시 상자에 넣고, 두 손바닥을 펼쳐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얀스, 언제까지 이렇게 멈춰있을 순 없겠지. 롤리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표정만큼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형은 예나 지금이나 든든한 나의 파트너야. 하나뿐인 파트너.”
이젠 자책하고 후회하며 울지 않을게. 멍청하게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건 우리한테 어울리지 않잖아? 안 그래? 가볍고 밝은 미소를 지은 롤리는 액자도 상자에 넣어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덩이를 털어내고 올라간 재킷을 잡아 내린다. 후우, 하늘을 올려다보곤 다시 고개를 내렸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묘비를 한 번 더 쓰다듬곤 상자를 집어 들었다. 다음에 또 올게, 얀스. 그리고 롤리는 몸을 돌려 앞으로 걸었다. 얀시에게 약속한 것처럼, 당당한 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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