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HQ 설정+이영도 님의 '폴라리스 랩소디'에 등장하는 싱잉플로라 설정을 섞음.
싱잉플로라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다음 링크를 보시면 됩니다. https://namu.wiki/w/%EC%8B%B1%EC%9E%89%20%ED%94%8C%EB%A1%9C%EB%9D%BC
** 다이치의 이름이 대지(大地)라서 더욱 더 보고싶었던 망상. 보는 이에 따라서 초반에 잔인하다고 여겨질 묘사가 살짝 포함되어 있습니다.
*** 포스타입이 불안정해서 티스토리에도 함께 백업합니다.
1.
쿠로오 테츠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손에 들려 있던 바구니가 바닥으로 추락함과 동시에 돌풍이 일었다. 기세 좋게 집을 태우던 불길이 순식간에 꺼졌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축 늘어진 사와무리를 집어 던지려던 사람들은 그 갑작스러움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사그라진 불길보다 더욱 무서운 분노로 타오르는 남자를 마주한 순간, 사람들은 불길을 잡은 돌풍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깨달았다.
마법사다. 마법사가 돌아왔어. 사와무라의 팔다리를 붙잡고 있던 두 남자의 뒤쪽에서 마을 사람들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희게 질린 얼굴을 한 남자들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 툭, 하는 무거운 소리와 함께 사와무라의 몸이 땅에 떨어졌다. 팔과 다리는 가닥가닥 공중에서 흔들리다 땅 위로 늘어졌고, 목 뒤쪽에서부터 박힌 단검이 조금 더 앞으로 쑥 밀려 올라왔다. 힘없이 꺾인 머리는 땅에 닿지 못하고 쿠로오가 있는 쪽을 향해 기이한 형태로 기울었다. 그 모든 것을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담아낸 쿠로오가 한 발자국 내딛자 사람들은 서너 걸음 뒤로, 옆으로 물러났다. 누군가는 비명 섞인 고함을 내지른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은 쿠로오의 관심 밖이었다.
마침내 쿠로오가 사와무라의 곁으로 다가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사와무라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오른손을 휙 내젓자 사와무라의 목을 꿰뚫고 있던 단검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왈칵 터져 나온 붉은 피가 쿠로오의 흰 셔츠를 적셨다.
“사와무라.”
바싹 마른 입술을 비집고 눅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생명을 잃은 까만 눈은 어떠한 반응도 돌려주지 않았다. 사와무라. 잔뜩 물기어린 목소리에 왜 그러냐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던 이는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린 채였다.
스르릉, 검이 검집에서 뽑히는 소리에 비통에 잠겼던 얼굴 위로 다시금 분노가 되살아났다. 농기구 등을 쥐고 있던 사람들 사이로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존엄하신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간악한 마법사를 처단한다.”
병사들보다 조금 뒤쪽에 있던 기사가 뽑아든 검을 높이 쳐들고 외쳤다. 기합을 내지르며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쿠로오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 다시 제 품에 안겨 있는 사와무라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사와무라.”
나즉한 쿠로오의 말과 함께 한 번 더 돌풍이 불었다. 불길을 잡기 위해 불어 닥친 아까의 바람과는 달랐다. 제멋대로 휘몰아치는 바람의 옷자락 사이사이마다 날카로운 칼날들이 붙어 있었다. 병사들의 비명이 나뭇가지를 붙잡아 흔들었고 뚝뚝 떨어지는 핏물들이 땅을 적셨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병사들의 몸이 땅 위로 쓰러지자마자 이번에는 어둠 속에서 마물들이 튀어나왔다. 흰 연기를 뿜어내는 침을 뚝뚝 흘리며 마물들이 쓰러진 병사들을 덮쳤다. 갑옷들은 그들이 흘리는 침에 산화되어 시커먼 흔적만을 남겼다. 와그작 와그작 뼈가 씹히고 살이 찢어지는 소리들 위로 사람들의 비명과 뜀박질하는 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로오는 제 품의 사와무라만을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마물들도 어느새 사라졌는지 주변이 조용해졌다. 쿠로오는 사와무라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들어 제 머리를 더듬었다. 말랑한 두피와 부드러운 머리카락 외의 또 다른 것,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던 자리가 손끝에 닿았다. 며칠 전, 사와무라가 다치지 말라며 정성스럽게 갈아주어 표면이 매끄러워진 그것.
“걱정 마, 사와무라. 널 이대로 잃을 생각은 없어.”
그의 곁에 있기 위해 제 힘의 원천이라고도 할 수 있는 뿔을 망설임 없이 잘라냈었다. 그 뿔이 있었던 자리를 더듬으며 쿠로오가 나직이 말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우는 듯 웃는 얼굴로 쿠로오가 고개를 숙여 사와무라에게 입을 맞췄다.
2.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열 세 개의 계단 위에 마련된 화려한 옥좌에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앉은 오이카와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쿠로오는 입을 꾹 다문채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마족을 하지 않을 거랍니다, 마왕 나으리~’ 하면서 잘라버린 뿔을 휙 던지고 나갈 땐 언제고 뿔을 다시 찾으러 왔다고? 마족이 무슨 사표 썼다가 다시 입사할 수 있는 그런 자리랍니까? 이 오이카와 씨가 그 동안 별의 별 상황들을 다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요. 어떻게 생각하나요, 지고하신 마법사 양반?”
입이 있으면 어디 말을 해보시지 그래? 심드렁했던 얼굴 뒤에 감춰져 있던 분노가 모습을 드러냈다. 쿠로오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마왕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속은 잔뜩 긴장해서 땀이 줄줄 났지만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푸, 하고 웃었다. 오이카와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리고 그것이 나쁜 징조가 아님을 쿠로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분 치고는 제 뿔을 소중히 보관해주셨네요, 마왕님.”
“뭐?”
“느껴지거든요. 다른 놈한테 넘기지 않고 그대로 두신 게 말입니다.”
그러니, 감사히 돌려받겠습니다. 어깨까지 한 번 으쓱이며 몸에 힘을 뺐다. 팔짱을 끼고 한쪽 다리에 힘을 줘 비스듬하게 선 채로 오이카와의 시선을 마주했다. 입가에 경련이 일 것 같았지만 쿠로오는 모든 집중력을 끌어 모아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팽팽한 신경전은 오이카와의 웃음으로 끝났다. 하여튼 못 당하겠다니까, 쿠로쨩. 어느새 친근한 어투로 쿠로오의 이름을 부른 오이카와에 긴장이 탁 풀렸다. 탁한 금색의 눈동자에 안도의 빛이 스치는 것을 오이카와는 알았지만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뭐, 나중에 놀려먹을 수 있겠지, 정도로 가볍게 생각한 그가 손을 휙 내저었다. 환한 빛이 번쩍였다가 사라진 자리에 나타난 제 뿔을 쿠로오가 손을 뻗어 잡았다. 낮고 빠르게 주문을 외며 쿠로오는 양 손에 쥔 뿔을 원래의 위치에 가져다댔다. 천둥을 닮은 소리가 마왕의 성을 가득 울렸고, 검고 음험한 기운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가 사라졌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오이카와를 향한 눈이 새빨갛게 빛났다.
“돌아온 것을 환영해, 쿠로쨩. 진짜 쿠로쨩 없어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남쪽 용족 무리들이 아주 그냥 이 때다 하면서 달려드는데 그걸 혼자서 억누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 동안 속 썩인 거 다 용서해 줄 테니까 얼른 남쪽에 다녀왔으면 하는데.”
“거 참, 그렇게 나약해 빠졌던 겁니까, 마왕님? 그깟 날개달린 도마뱀들 하나 처리 못하고요? 저 없었을 때는 대체 어떻게 마왕노릇을 하신 겁니까?”
“뵈는 거 없이 기어오르는 거 보니 쿠로쨩 돌아온 실감이 나는데?”
그래서 반갑죠? 당연한 말을. 해사하게 웃으며 빨리 가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젓는 오이카와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한 쿠로오가 아참, 하며 다시 허리를 곧게 폈다.
“다녀오면 제 부탁 좀 들어주시죠, 마왕님.”
“나흘 안에 정리하고 오면.”
“이틀.”
손가락을 두 개 펼치며 말하는 모습에 오이카와가 휘파람을 불었다. 무슨 소원이실까? 별거 아니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요. 여상하게 말하며 쿠로오는 사와무라의 피로 얼룩진 셔츠 위에 손을 얹었다. 얼룩덜룩했던 흰 셔츠가 순식간에 붉은 로브로 변했다. 이틀이야, 사와무라. 이틀만 기다려줘. 로브를 정리하는 쿠로오의 눈이 붉게 빛났다. 차갑고도, 슬픈 빛이었다.
3.
이틀 하고 몇 시간이 지난 뒤, 쿠로오는 다시 사와무라의 앞에 섰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관에 누워 두 손을 가슴 위에 가지런히 모은 사와무라는 어깨를 살짝 흔들어도 곧 깨어날 것 같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쿠로오는 얼음관의 뚜껑을 치운 뒤 사와무라의 얼굴 위로 허리를 숙였다. 입술에 닿은 그의 이마는 차갑게 식어 있었으나 쿠로오는 괘념치 않았다.
숙였던 허리를 편 쿠로오는 비단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것을 꺼냈다. 달빛에 이리저리 비춰보는 그것은 자두씨 만한 크기의 씨앗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씨앗에 짧게 입을 맞춘 뒤 쿠로오는 사와무라의 심장에 그 씨앗을 심었다.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주문을 외는 쿠로오의 목소리에 맞춰 죽어 있던 심장이 쿵, 움직여 제 안으로 들어온 씨앗을 꽉 움켜쥐었다. 살아있을 때보다는 느리지만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며 씨앗을 품는 심장이 손바닥에서 느껴졌다. 쿠로오의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디에 심으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매우 구하기 힘든 것이야 쿠로쨩, 으로 시작되었던 오이카와의 잔소리가 네 시간을 넘어가게끔 만들 정도로 기르기 까다롭고 관리가 어려운 식물. 꽃을 피운 뒤 어떠한 과정을 거쳐 리포밍을 하면 사람의 모습을 하게 되는 식물. 그러하기에 제국의 8대 불가사의에 들어가는 식물.
쿠로오가 사와무라의 심장에 심은 것은 싱잉플로라의 씨앗이었다.
4.
그 이름에 걸맞게 싱잉플로라는 밤마다 낮은 허밍을 닮은 노래를 불렀다. 사와무라의 가슴 위로 피어난 붉은 꽃도 그러했다. 때로는 부드럽고 따뜻한 노래였고 때로는 음침하고 소름끼치는 노래였고 때로는 울적하게 시작해서 밝게 끝나는 노래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든 노랫소리는 사와무라의 목소리를 닮은 듯해서 쿠로오를 더욱 더 애타게 했다.
생각보다 일찍 꽃이 피었기 때문에 쿠로오는 오이카와의 염려가 괜한 것이 아니었나 했다. 그러나 두세 달이 더 지난 뒤 쿠로오는 오이카와가 무엇을 염려했는지 깨달았다. 싱잉플로라는 꽃을 피우는 것도 힘들었지만 리포밍시키는 과정이 더욱 더 힘들고 고된 일이었다.
“기다릴 수 있어, 사와무라.”
편안하게 감긴 사와무라의 눈 주변과 노래하는 붉은 꽃잎을 차례로 어루만지며 쿠로오가 웃었다. 두 뺨을 눈물로 적신 채로.
5.
그리고 마침내, 쿠로오는 그 기나긴 기다림 끝에 보답을 받았다.
6.
새카맣게 타버렸던 집은 쿠로오의 주문 한 번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모든 식물이 그러하듯 싱잉플로라 역시 햇빛과 물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쿠로오는 사와무라의 관을 집밖에 두고 있었다. 되도록 쿠로오는 사와무라와 싱잉플로라의 곁을 떠나지 않고자 하였으나 다시금 제 뿔을 되찾고자 마왕에게 복속된 탓에 그의 부름이 있는 날이면 곁을 비워야했다. 그 때마다 쿠로오는 여러 겹의 결계를 쳐놓고 떠나곤 했다. 그 날 역시도 그러했다. 오이카와의 명령으로 제국의 국경을 한 바탕 휩쓴 뒤 먼지를 채 털지 못하고 재빠르게 돌아온 쿠로오는 제가 소중히 보호하던 꽃을 꺾으려는 인간을 발견했다. 마침 밤이었고, 싱잉플로라의 노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홀릴 수 있을 만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흑마법사의 이중 삼중의 결계가 약한 부분으로 자신을 이끌었다고 그는 항변하고 싶었으나 이미 분노에 눈이 뒤집힌 쿠로오에게는 통할 리 없는 것이었다.
“네놈들이 감히…! 또 사와무라를 죽이려 들어!”
날카롭게 튀어나온 쿠로오의 손톱이 남자의 목덜미를 뚫으려는 때였다. 쿠로오? 싱잉플로라의 노랫가락이 바뀌었다. 쿠로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제 목을 꽉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리자 남자는 있는 힘껏 그 손에서 벗어나 달아났다. 그러나 쿠로오는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쿠로오. 아까보다 조금 더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쿠로오를 움직이게 했다.
천천히 뒤를 돌았다. 약간 굽어 있던 줄기가 빳빳하게 세워져 있었다. 새빨간 꽃잎들이 달빛을 흠뻑 마셨다. 꽃을 피워낸 사와무라 다이치의 몸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꽃이 변했다.
쿠로오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쿠로오가 너무나도 기다리던 모습으로.
다이치. 환희에 찬 눈물을 흘리며 쿠로오가 활짝 웃었다. 천천히 눈을 뜬 ‘사와무라’가 익숙한 얼굴로 웃으며 테츠로, 하고 답했다.
다시 돌아온 ‘사와무라’가 첫 걸음을 뗐다. 쿠로오는 두 팔을 벌려 제게 다가오는 ‘사와무라’를 품에 안았다. 예전처럼 따뜻한 온기는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이제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며 쿠로오는 돌아온 ‘사와무라 다이치’를 꽉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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