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아득해진 눈앞을 확 스치는 섬광에 테루시마 유우지는 잠시 비틀거렸다. 허우적대는 손을 뻗어 겨우 난간을 붙들었다. 억지로 눈을 깜빡이자 다시 시야가 환해졌다. 먹혀들 듯 사라졌던 소리가 제 자리를 찾듯 테루시마의 귓가를 때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루시마의 시선은 오로지 한 곳에 집중되었다. 네트 위를 오가는 공도, 환상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또래 선수들도 아니었다. 서브가 네트에 걸려 어찌할 줄을 모르는 후배를 다독이는 그에게 테루시마는 온전히 제 시선을 빼앗겼다.
더 정확하게는, 하고 생각한 테루시마는 불에 손을 데인 듯 화들짝 놀라 난간을 잡은 손을 놓았다. 나, 나, 잠시 화장실 좀! 함께 경기를 보러 온 친구들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테루시마는 그 자리를 빠르게 벗어났다.
복도는 한산했다. 한창 경기가 진행 중인 덕분이었다. 그러나 테루시마는 화장실 칸의 문을 잠근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변기 커버를 내리고 그 위에 앉은 테루시마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꽉 모았다. 최대한 등을 둥글게 말고 두 팔로 정강이와 무릎 부근을 꽉 끌어안았다. 어느 한 부분에서부터 시작된 열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테루시마는 조금 전, 섬광처럼 지나간 어느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사실에 대해 테루시마는 부분적으로는 인정했고 부분적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테루시마 유우지는 사와무라 다이치에게 관심이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테루시마 유우지가 사와무라 다이치에게 가지는 관심에는 배구 외에 다른 감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 역시 사실이다.
테루시마 유우지는 타인의 신체 어느 한 부분에 페티쉬가 있다. …이 부분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여느 남학생과 다르지 않다. 자신 역시도 여성의 부드러운 곡선이 도드라져 보이는 몸을 좋아하고, 잡아보면 저보다 말랑하고 따뜻할 것 같은 신체를 좋아한다. 연애를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몇 번의 연애에서도 여자 친구의 신체 어느 한 부분에서 성적인 충동을 느낀 적은 없다.
그런데 어째서!
가라앉은 것 같던 열기가 얼굴로 확 몰린다. 카라스노가 서브권을 가져올 수 있었던 상황이 다시 눈앞에 펼쳐진다. 리시브를 하기 위해 집중하던 사와무라가 동물과도 같은 감각으로 잽싸게 움직여 몸을 날리던 그 순간. 코트를 박차기 위해 발목에 응축되어 있던 힘이 폭발하던 그 순간을 잊으려 노력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 발목을 한 번이라도 움켜잡아보았으면.
그 생각을 애써 떨치고 나왔을 땐 이미 경기가 모두 끝난 뒤였다.
그 날 이후로 테루시마는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나 사와무라의 발목을 보았을 때와 같은 감각이 느껴지진 않았다. 왜 하필 발목이었을까. 테루시마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답을 찾진 못했다. 그래서 테루시마는 잊었다. 사와무라 다이치에 대한 제 특별한 관심만을 남겨둔 채, 그 날 제가 느낀 그 감정은 잊었다.
∴
사실은 애써 잊었다고 생각했다. 잊는다고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
테루시마가 입학한 대학교에 사와무라 다이치가 다니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는 놀라운 우연이었고, 그것은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와무라는 타교였으나 같은 미야기 출신의 테루시마를 카라스노의 후배처럼 반겨주고 챙겨주었다. 그러다 저녁 초대를 받았다. 아무래도 테루시마의 식단 대부분을 차지하는 즉석음식들과 바깥 음식들 때문인 것 같았다. 자취를 하면 더 잘 챙겨야 한다며 엄한 얼굴로 말하던 사와무라를 떠올린 테루시마의 얼굴 위로 미소가 스쳤다. 흠흠, 목소리를 몇 번 가다듬고 벨을 눌렀다. 부산스러운 소리 뒤로 현관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서와. 찾아오는데 힘들진 않았어?”
문을 열어준 뒤 반걸음 뒤로 물러선 사와무라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네, 괜찮았어요. 하고 대답하며 운동화를 가지런히 벗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테루시마는 숙였던 등을 펴지도 못한 채 굳었다.
제 집이니까 당연했다. 사와무라 다이치가 편안한 차림으로 있는 것은. 그러나 사와무라 다이치의 드러난 발등과 발목이 제 시야 가득 들어오자 테루시마는 예전에 스스로에게 던졌던 의문의 답을 깨달았다.
왜 하필 발목이었을까.
신체의 하중을 가장 많이 견뎌내지만 눈에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 신체부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단단하고 굳건하게 무게를 지탱해주는 곳.
첫 경기에서 자신이 사와무라 다이치와 맞붙었을 때 느꼈던 감정과도 닮은 곳.
잊고 있었던 감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테루시마를 덮쳤다. 그리고 꼼짝을 않고 등을 숙인 채 굳어 있는 테루시마의 등 위로 걱정이 담긴 사와무라의 손이 닿은 순간.
테루시마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과 사와무라의 발목을 붙잡고 싶다는 충동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그저 울고 싶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