롭 스타크에게 주어진 역할은 많았다. 네드 스타크와 캐틀린 스타크의 첫째 아들, 동생들의 든든한 오빠이자 형, 스타크 가문의 가업을 이을 후계자, 촉망받는 제자, 믿음 가는 동기이며 선후배 등등. 롭은 제게 주어진 역할들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더 잘하겠다고 욕심을 내는 편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롭이 불만을 표출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
“…….”
“…….”
“……뭐가 문제야, 롭.”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다. 불만으로 똘똘 뭉친 날카로운 시선이 존의 정수리를 쿡쿡 찔렀다. 슬쩍 시선을 들었다. 볼통하니 나온 입술부터 일자로 가늘어진 눈매까지 골고루 불만이 들어차 있다. 존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웅크리고 있던 어깨를 펴고 등을 세웠다.
“롭.”
“…….”
“과제 같이 하자고 해놓고서 그렇게 계속 화난 채로 있을 거야?”
롭의 눈이 더욱 더 가늘어졌다. 오랜 경험으로 존은 롭의 불만이 자기 스스로도 납득시키지 못한 성질의 것임을 눈치 챘다. 그와 함께 타인에게는 좀처럼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 롭을 이렇게까지 몰아세운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존은 ‘함께 과제를 하는 사이좋은 사촌’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졌다.
롭. 부드럽고 다정하게 변한 목소리로 롭의 이름을 부르며 펜을 놓은 손을 뻗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 위를 감쌌다. 손등과 손목을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쓸어주다가 조금 더 위로 올려 손목을 쥐었다. 쿵쿵, 맥박이 느껴지는 안쪽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달래듯 문질렀다. 그 애정이 담긴 손길에 롭의 얼굴이 조금 부드럽게 풀어졌다.
“무슨 일 있었어?”
“…있지, 존.”
“응.”
머뭇거리며 입술만 달싹이는 롭의 얼굴이 이번에는 조금 붉어졌다. 존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곤 느리게 깜빡이자 롭이 얼굴을 더욱 더 붉히며 시선을 테이블 위로 떨어뜨렸다. 롭? 저 때문에 대화다운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지만 존은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더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준다. 그 사실이 롭이 조금 더 욕심을 낼 수 있도록 응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롭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너 안경 말이야.”
“안경?”
“그래. 안경.”
요즘 학교에서는 안경을 쓴 존 스노우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존 스스로는 몰랐겠지만. 안경을 쓰고 났더니 멍한 얼굴이 좀 달라 보이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소피, 너는 어때? 글쎄. 그렇지만 맨 얼굴보다는 안경을 쓰니까 더 잘생겨 보이는 것 같긴 해. 한 번은 도서실에서 머리 묶고 책 읽는 스노우를 봤는데…. 봤는데? 화보 같았어. 말도 안 돼! 아냐 진짜야! 까르르. 까르르. 그런 이야기들은 사근사근 조용조용 흘러나오다가 어느 순간부터 눈덩이처럼 불어나 롭의 신경을 건드릴 만큼 커져버렸다. 그 안경, 내가 골라준 거야. 그래서 존에게 잘 어울릴 수밖에 없는 거라고! 그 때마다 ‘사이좋은 사촌’의 허울 속에 갇힌 ‘존의 연인’ 롭 스타크가 처절하게 외쳤다. 밖으로 새어나올 수 없는 짜증은 롭의 속만 긁어댔다.
언제나 그랬다. 존을 사랑하는 롭 스타크는 철저히 비밀로 부쳐야 했기 때문에.
“너, 안경은 나랑 둘이 있을 때만 쓰면 안 돼?”
“어…어?”
“안 돼?”
“그렇지만 갑자기 왜….”
하지만 롭도 거기서는 우물대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차마 다른 사람들이 안경 쓴 널 보면서 잘생겼다고 자꾸 쳐다보는 것이 싫다고 하기 뭣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존 스노우는 제 기분에나 눈치가 빠르지 다른 부분에선 직설적으로 말해주지 않는 이상은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기에 롭은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안경 벗으면 칠판이 잘 안 보여?”
“응, 그래서 너랑 같이 가서 맞춘 거잖아.”
“하지만, 존….”
“응.”
“…….”
“응, 롭. 듣고 있어.”
“……안경…너한테…잘 어울린단 말이야.”
“응, 그래서 네가 골라준 거잖아. 이게 제일 잘 어울….”
“아니 그게 아니고!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게 아니고!”
“로, 롭?”
“다른 애들도 안경 쓴 네가 잘 생겼다고 그러잖아!”
아, 결국 말해버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친 롭의 얼굴이 이제는 터질 듯 시뻘겋게 변했다. 그런 롭을 따라 멍한 얼굴을 들어 올린 존의 얼굴도 이내 천천히 붉게 변해갔다.